종이와 펜이 필요한 바로 그 순간에 그것이 없어서 낭패를 보는 때가 있기 마련이다. 보통 상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다. 머릿속으로 완벽하게 정리되었다고 생각하는 순간부터 허둥대기 시작한다. 지금 바로 종이 위에 옮겨놓지 않으면 이제까지 한 모든 생각이 상상의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사라져버릴 것 같은 두려움에 빠지는 것이다. 잠깐 정신 잃은 사람처럼 두어 번 '종이...'를 중얼거린 뒤에야 정신을 수습하고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비행기 안에서 상상의 나래를 마음껏 펼치다가 마지막 순간에 허둥대며 승무원을 부른 적이 많다. 가까이 있는 승무원이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있으면 다행이지만, 만약 승무원이 종이와 펜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나는 더 허둥대면서 "냅킨, 냅킨 없어요?" 하고 승무원을 재촉한다. 당황한 승무원은 급히 내게 냅킨을 건네주고, 나는 냅킨 위에 상상 속에서 완성한 아이디어를 그린다. 냅킨이건 메모지건 내 상상 속의 제품이 종이 위에 그려진 뒤에야 안도의 숨을 내쉰다.
- 김영세의 <이노베이터>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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